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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화 파과(THE OLD WOMAN WITH THE KNIFE · 2025) : 전설의 킬러가 느끼는 첫 감정

by cine:) 2025.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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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규동 감독의 새로운 시도, 장르를 넘어선 감성 누아르

2025년 4월 30일 개봉한 〈파과〉는 독특한 색채의 영화들을 만들어온 민규동 감독의 도전적인 신작입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부딪히는 과거와 감정’이라는 테마를 킬러라는 극단적인 캐릭터를 통해 풀어낸 이 작품은, 액션과 서사를 모두 놓치지 않는 탁월한 균형을 보여줍니다. 기존의 장르 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는 ‘살인’이라는 폭력의 행위를 통해 인간 내면의 공허와 따뜻함, 복수와 용서의 복잡한 감정을 밀도 높게 그려냅니다.

민규동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살인자도 한때는 누군가의 아이였고, 누군가를 사랑했던 사람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단순한 범죄극이나 액션 영화의 한계를 넘어서는 서사를 만들어냈습니다.

 

이혜영부터 김성철, 연우진까지 – 인물의 깊이를 살리는 캐스팅

영화 〈파과〉의 가장 큰 강점 중 하나는 단연 배우들의 몰입감 있는 연기입니다. 조각 역을 맡은 이혜영은 오랜 시간 관객들의 신뢰를 받아온 배우답게, 냉혹한 킬러와 감정을 잃어버린 인간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을 절제된 연기 속에 녹여냈습니다. 특히 손이 떨리고, 몸이 예전 같지 않은 노년의 킬러가 마지막 감정을 마주하는 장면은 이혜영의 눈빛과 숨결 하나로도 가슴을 먹먹하게 만듭니다.

김성철은 젊고 날카로운 킬러 ‘투우’를 연기하며, 표면적으로는 무표정하고 냉정한 인물이지만 그 안에 복잡하게 얽힌 과거와 감정을 품고 있는 인물로 깊이를 더했습니다. 그의 감정이 폭발하는 후반부는 단순한 액션 이상의 무게감을 지닙니다.

그리고 연우진이 연기한 수의사 강봉회는 이 영화의 따뜻한 중심입니다. 무표정한 조각이 그의 따뜻함에 조금씩 녹아드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며, 관객이 조각의 감정선에 공감하도록 도와줍니다.

 

조용하지만 치밀했던 삶, 그리고 찾아온 균열

〈파과〉의 줄거리는 명확하면서도 인물 중심으로 깊게 파고듭니다. 조각은 40년간 단 한 번의 실수 없이 사람을 제거해 온 베테랑 청부살인자입니다. 평범한 해충 방역 회사처럼 보이는 ‘신성방역’은 사실 사회악을 처리하는 비밀조직이고, 조각은 그 안에서 신화적인 존재로 통합니다.

하지만 노화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법. 조각은 체력이 예전 같지 않고, 손이 떨리며 감각이 무뎌지는 자신을 느끼며 흔들립니다. 조직은 그녀를 대체할 후계자로 능력 있는 젊은 킬러 투우를 내세우고, 조각은 점점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잃어가는 위기를 맞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길거리에서 다친 개를 보고 동네 수의사 강봉회를 찾게 되며 조각은 예상치 못한 감정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그녀가 10대 시절 ‘손톱’이라 불리며 살아가던 시절, 유일하게 따뜻함을 느꼈던 햄버거가게 사장 ‘류’와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이 감정은 조각을 조금씩 변화시키며, 스스로 묻어두었던 과거의 기억을 다시 꺼내게 만듭니다.

 

과거의 소년, 복수인가 그리움인가

한편, 투우는 단순한 후계자가 아닙니다. 조각이 과거에 제거한 피해자의 가족으로, 처음에는 복수를 위해 조직에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점차 드러나는 그의 진심은 예상과는 다릅니다. 투우는 오히려 조각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있었던 인물이었고, 어린 시절 잠시 함께했던 조각을 ‘엄마’ 같은 존재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조각이 자신보다 강봉회에게 더 많은 감정을 쏟는 모습에 혼란과 질투를 느낀 투우는 결국 강봉회의 아이를 납치하며 조각과 최후의 대결을 벌입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결국 승자는 조각이 되지만, 그 승리는 결코 기쁘거나 통쾌하지 않습니다. 투우는 끝까지 조각을 죽이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며 눈물을 흘리고, 조각 또한 그런 투우를 껴안듯 바라봅니다.

 

해충 방역이라는 위장, 인간 사회의 어두운 은유

〈파과〉는 독특한 설정으로 현실 사회를 날카롭게 풍자합니다. 겉으로는 해충 방역 업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사람을 죽이는 조직인 ‘신성방역’은 현대 사회의 ‘정의’라는 명분 아래 벌어지는 폭력의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사회악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제거하는 일, 그것이 과연 정당한가? 아니면 또 다른 악인가?

이 영화는 ‘벌레’와 ‘인간’을 교묘히 겹쳐 놓음으로써, 도덕과 법, 정의의 경계를 묻는 작품입니다. 특히 조각의 눈을 통해 보는 세상은 무채색이고 차갑지만, 그 안에서 반짝이는 인간적 감정은 관객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해외에서도 주목받는 감성 액션 누아르

〈파과〉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2025 칸 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 공식 초청, 베를린 영화제 시사회에서는 “감정이 있는 액션 영화”라는 찬사를 받으며 뜨거운 박수를 받았습니다. 특히 이혜영의 연기는 “동아시아 영화 속 가장 강렬한 여성 캐릭터 중 하나”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인상 깊습니다.

단순한 총격전이 아닌, 관계와 감정의 서사를 담은 누아르. 그것이 〈파과〉가 국내외에서 주목받는 이유입니다.

 

〈파과〉는 폭력과 감정,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작품입니다. 단순한 복수극이 아닌, 인간과 인간 사이의 연결, 상실, 용서의 여정을 담은 이 영화는 액션을 넘어선 감성 누아르로서 관객의 마음에 오랫동안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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